<채식주의자> -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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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책 제목을 보면서 ‘육식에 회의감이 들어 채식으로 바꾼 사람의 이야기인가?’ 생각했다.
물론 책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인물이 채식주의자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녀가 채식주의자가 된 이유, 이 책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그녀의 모습은 단순히 육식을 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 책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작가의 말에 적혀 있듯이 3가지 이야기는 세 편의 중편소설이 합해진 장편소설이다.
각 이야기마다 말하는 주체는 다르지만 세 이야기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영혜’이다. 그리고
제목에서 말하는 채식주의자도 그녀이다.
'채식주의자'
첫 이야기인 ‘채식주의자’는 평범하게 살아온 영혜의 남편 관점으로 쓰였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평범하게 산다는 말에 집착하는 남편. 사람들이 보통이라고 말하는 기준에 어긋나는 것을 극도로 꺼려 한다.
그래서, 그어진 선에서 어긋남이 없어 보이는 영혜와 결혼을 하였다.
그의 결혼 조건은 단지 ‘보통이란 기준 안에 들어오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 평범한 일상 속에서 영혜의 변화는 그의 일상을 망쳐버렸다.
모든 육식을 거부하며 그 원인은 꿈 때문이라는 말만 반복하는 그녀.
그의 시선 속에서 그녀는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보통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억압하고 있는 것인가 생각되었다.
그 보통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가?
남편의 시선 속에선 그녀는 잘못된 인물이지만 잘못되었다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일반적이라고 여기는 것들만 옳다는 착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녀는 자신이 육식을 거부하는 이유는 꿈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꿈을 꾸게 된 원인이 주변에서 평범을 강요하며 억압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야기 후반에 영혜의 부모님, 언니의 가족, 동생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이곳에서 부모님은 변해버린 딸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기준을 강요하여 그녀를 몰아간다.
너 하나만 잠잠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남들 다 하는 걸 안 한다는 것을 혐오하는 것이 만연한 사회에서 그녀의 변화가 이상하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이렇게 첫 이야기에서는 그녀에게 찾아오게 된 변화에 대한 여러 질문을 머금게 하였다.
'몽고반점'
두 번째 이야기의 시선은 영혜 언니의 남편 즉 영혜의 형부이다.
부인인 영혜 언니에게 영혜에게는 몽고반점이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말을 듣고 나서 영혜에 대한 욕망이 생긴다.
그는 아직까지 몽고반점이 남아있는 그녀의 몸에 대한 열망을 영상으로 남기고 싶어 한다.
그러나 대상이 처제라는 관계로 인해 세상이 바라보는 불순한 시선과 자신의 꿈 사이에서 고민한다.
결국 영혜에게만 허락은 받은 채 영상을 완성하게 된다.
온몸에 꽃이 그려진 벌거벗은 남녀가 하나가 되는 영상. 그 남녀는 그와 그의 처제인 영혜인 것이다.
꿈을 이룬 그의 끝은 완성 한 후 잠이 든 그와 그녀를 마주한 부인과 대면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다름 아닌 ‘몽고반점’이다.
이 몽고반점은 오직 어린아이들의 엉덩이와 등만을 덮고 있는 반점이다.
어른들에게는 이미 퇴화되고 없어져 있어야 한다.
그것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은 아이와 같은 순수성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탐하고 싶어 하는 것이 그 순수함 아닐까?
우리 모두 태어났을 때 가지고 태어나지만 어른에 다가갈수록 사라지는 것.
그것이 몽고반점과 순수함의 공통점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읽기 거북한 파트였다.
물론 작가가 책을 많이 읽지 않은 나조차 선명하게 상상할 수 있도록 세세하고 친절하게 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두 남녀가 하나가 되는 장면은 꽃이 만개한 벌판 같은 느낌을 주는 동시에 불쾌감도 주었다.
그 관계라는 것이 불쾌감의 원인일 것이다.
아마 나는 통상적인 관념에서 벗어난 시야를 갖지는 못하나 보다.
'나무 불꽃'
마지막 이야기는 ‘나무 불꽃’이다. 이 이야기는 전편에 등장한 영혜 언니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불순한 관계를 가진 남편과 세상의 시선으로 미쳐가고 있는 영혜를 감당해야 하는 그녀.
그녀는 나무가 되고 싶다고 말하며 더 이상 아무것도 먹지 않는 영혜를 바라본다.
영혜에게 억지로 영양분을 공급 하기 위해 의료진들이 그녀의 팔과 다리를 고정시키고 식도를 억지로 열게 하며
주사를 놓으려는 장면을 바라보는 언니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의료진을 멈추게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꿈일지 모른다고 말한다.
너무 먹먹했다. 학교 도서관에서 읽고 있지 않았으면 펑펑 울었을지도 모른다.
영혜 언니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언니로서, 딸로서, 삶을 견뎌야 하는 그녀의 삶이 어떨지 너무나도 느껴졌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그녀는 그것이 변명이 아니었을 것이다.
정말로 그 순간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어찌 보면 그녀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그런 선택과 행동을 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언니와 같은 상황에 있다면 나는 영혜를 감당할 수 있을까?
어찌 되었던 죽어가고 있는 그녀를, 모든 상황에서 달아나버린 영혜를 말이다.
결국에 언니는 영혜를 받아들인다. 의료진의 치료를 중지시키는 모습은 영혜가 죽어가고 싶어 하는,
나무가 되고 싶어하는 그 마음을 인정해 주는 것 같았다.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을 멈추고 그녀를 받아들이려는 것이 아닐까?
주변에서 영혜에게 무언가를 먹이게 하려고 할 때 영혜는 말한다. 죽으면 안 되냐고 말이다.
그렇다. 왜 우리는 우리 삶을 끝내는 자유는 갖지 못하는 것일까?
주변 사람들에 의해 억지로 끌려가고 있는 삶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영혜는 자신이 죽어도 된다고 말한다. 나무가 되고 싶다고 말이다.
그런 죽음은 보통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어긋난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을 죽지 않게 하는 이유가 결국 그 사람의 죽음을 감당하고 싶지 않은 것 아닌가?
그 죽음의 연장도 어찌 보면 자신의 만족을 위해 강요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강요가 결국 영혜에게는 폭력일 것이다.
쉽게 읽힌 것에 비해 기존의 내 틀을 깨는 말들이 많았다.
나는 책에 나오는 그저 평범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런 나에게 영혜는 초반에 불편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녀의 삶을 바라보고 여러 번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하다 보니 왜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튼 여운이 많이 남는 책이다.
책을 덮고 나서 한동안 영혜에게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말이다.
1.
손을 뻗으면 그녀의 따스한 살을 만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왠지 나는 그녀를 만질 수 없었다. 그녀에게 말을 붙이고 싶지도 않았다.
2. 그렇게 생생할 수 없어,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이. 내 얼굴이, 눈빛이.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분명 내 얼굴이었어.
아니야, 거꾸로, 수없이 봤던 얼굴 같은데, 내 얼굴이 아니었어.
설명할 수 없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을.
3. 내가 들어가보지 못한, 알 길 없는, 알고 싶지 않은 꿈과 고통 속에서 그녀는 계속 야위어갔다.
4. 왜 나는 그때 놀라지 않았을까. 오히려 더욱 침착해졌어. 마치 서늘한 손이 내 이마를 짚어준 것 같았어.
문득 썰물처럼,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미끄러지듯 밀려나갔어.
식탁이, 당신이, 부엌의 모든 가구들이. 나와, 내가 앉은 의자만 무한한 공간 속에 남은 것 같았어.
5. 그 응시가 좌중의 기분을 끔찍하게 만들고 있었다.
(중략) 순간, 한번도 들어가본 적 없는 그녀의 머릿속이, 그 내부가, 까마득히 깊은 함정처럼 느껴졌다.
6. 무엇 때문일까.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져. 내가 뭔가의 뒤편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아. 손잡이가 없는 문 뒤에 갇힌 것 같아.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 걸 이제야 갑자기 알게 된 걸까.
어두워. 모든것이 캄캄하게 뭉개어져 있어.
7.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때, 다른 사람이 내 안에서 솟구쳐올라와 나를 먹어버린 때, 그때
8. 단 한시간이라도 의식을 놓을 수 있다면. 셀 수 없이 깨어나 맨발로 서성거리는 밤에 집은 식어 있어.
식은 밥, 식은 국처럼 싸늘해. 검은 창밖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어두운 현관문이 간혹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지만, 문을 두드린 사람 따위는 없어.
돌아와 이불 밑에 손을 넣어보면, 다 식어 있어.
9.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 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10.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저,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11.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내는 언제나 좋은 여자였다. 좋기만 한 것이 오히려 답답하게 느껴지는, 그런 여자였다.
12. 그는 문득 구역질이 났는데, 그 이미지들에 대한 미움과 환멸과 고통을 느꼈던,
동시에 그 감정들의 밑바닥을 직시해내기 위해 밤낮으로 씨름했던 작업의 순간들이 일종의 폭력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그의 정신은 경계를 넘어, 거칠게 운전중인 택시 문을 열고 아스팔트 바닥을 구르고 싶어졌다.
13. 그는 더 이상 그 현실의 이미지들을 견딜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을 다룰 수 있었을 때 그는 충분히 그것들을 미워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혹은, 충분히 그것들로부터 위협당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14.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 경계에 가 있는 사람의 덤덤한 음성이었다.
15.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16.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 나오는 기이한 덧없음, 단지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
17. 어쩌면 그녀의 내면에서는 아주 끔찍한 것,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어,
단지 그것과 일상을 병행한다는 것만으로 힘에 부친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일상에서는 호기심을 갖거나 탐색하거나 일일이 반응할 만한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18. 이 모든 것을 고요히 받아들이고 있는 그녀가 어떤 성스러운 것,
사람이라고도, 그렇다고 짐승이라고도 할 수 없는, 식물이며 동물이며 인간, 혹은 그 중간쯤의 낯선 존재처럼 느껴졌다.
19. 적나라하나 그 적나라함으로 인하여, 그 극한으로 인하여 도리어 고요히 정화되는 지점.
20. 이 이미지는 절정도 끝도 허락하지 않은 채 반복되어야 했다. 침묵 속에서, 그 열락 속에서, 영원히.
21. 결코 관통할 수 없을 것 같은 침묵에 싸여 있던 남편의 실체를 과연 그녀는 만난 적이 있었을까
22.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녀가 간절히 쉬게 해주고 싶었던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23. 살아간다는 게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아 보이는 태도…… 그런 게 감동을 줘.
24. 신기하게도 그 우묵하고 비좁은 공간이야말로 서른두 평의 아파트 안에서 가장 아늑하게 느껴지는 장소라는 사실을 그녀는 깨닫는다.
24. 그녀는 계속해서 살아갔다. 등뒤에 끈질긴 추문을 매단 채 가게를 꾸려나갔다.
시간은 가혹할 만큼 공정한 물결이어서, 인내로만 단단히 뭉쳐진 그녀의 삶도 함께 떠밀고 하류로 나아갔다.
25. 영혜를 가까이 둔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는 것을. 그애가 상기시키는 모든것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을.
사실은, 그애를 은밀히 미워했다는 것을.
이 진창의 삶을 그녀에게 남겨두고 혼자서 경계 저편으로 건너간 동생의 정신을, 그 무책임을 용서할 수 없었다는 것을.
26.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27.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게 됐어. 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구.
28. 왜, 죽으면 안되는 거야?
29.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30. 그는 비디오 속에 그토록 많은 날개 있는 것들을 집어넣었으면서도, 막상 자신은 가장 필요할 때 날아오르지 못했다.
31. 용서하고 용서받을 필요조차 없어. 난 당신을 모르니까.
32.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 왔을 뿐이었다.
33.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몸에 상처가 뚫려 있다고 느꼈다.
마치 몸뚱이보다 크게 벌어진 상처여서, 그 캄캄한 구멍 속으로 온몸이 빨려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34. 그녀는 다시 한번 집 안의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그것들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것과 꼭 같았다.
35.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 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36. 아마 그도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 잊혀졌던 연민이 마치 졸음처럼 쓸쓸히 불러일으켜지기도 한다.
37. 그 침대에 누워서, 사실은 죽어가고 있잖아. 그것뿐이잖아.
38. 그들은 여기 갇혀 있는 것이다. 이 여자가 그렇듯이. 영혜가 그랬듯이.
그녀가 이 여자를 안지 않은 것은, 영혜를 이곳에 가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39. 너덜너덜한 몸뚱이를 적시는, 바싹 마른 혈관으로 퍼지는 그 차가운 물기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결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다만 그녀의 몸속으로, 뼛속까지 스며들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