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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 흠집이 난 과실]
자신의 색을 띠며 빛나던 과일의 시기를 지나 멍들고 변형된 파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하지 않아도 변해가는 것은 과실들뿐만은 아니다.
우리 인간들 역시 찬란했던 한때를 지나 파과처럼 변해가고 결국 상실된다.
그러나 누구나 변해간다는 것을 한편으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파과처럼 변해버린 ‘남’에 대한 시선은
마치 나에겐 오지 않을 미래인 마냥 차갑고 날카롭다.
책은
변해가는 아니 이미 변한 주인공의 시선으로 글을 이끌어가며 주인공 이외에 ‘남’인 사람들의 시선이 어떠한지 보여주며 우리의 시선을 비판한다.
부품도 단종되고.
고장. 단종.
이제 그만 좀 버리세요.
이거 더 이상 못 버틴다니까.
교체.
위의 말은 고장 난 오래된 냉장고를 고치러 온 기사가 주인공인 조각에게 하는 말이다.
물론 대상은 오래된 냉장고이다.
그러나 말이 쓰인 여백이, 그 울림이 마치 조각에게 하는 말 같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조각 역시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주인공인 조각은 60대의 늙은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60대라는 나이, 여성이라는 성별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죽이는 일을 [책에 쓰인 대로 말하면 병역 작업을] 하는 킬러이다.
힘과 기술로 밀리지 않던 젊은 시절과 달리 일상의 노력을 추월한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노화에, 직장에서 그녀에 대한 신뢰가 엷어지게 된다.
투우와 같은 젊은 남성에게 그 신뢰를 빼앗기는 것이다.
그 교체라는 말이, 더 이상 못 버티니 버리라는 바꾸라는 말이 마치 그녀의 자리를 다른 새로운 사람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말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와 같은 시선으로 그들을 본적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이제는 새로운 시대에게 자리를 넘겨줘야 하지 않겠냐는 시선으로 말이다.
아직 흔히 젊다고 말할 수 있는 나이에 있는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분들에 대한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보지 않았다.
오로지 나의 입장에서 자리가 없음을 한탄했을 뿐
스스로 그 위치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그들의 입장은 깊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그들이 잘 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못 믿지는 않았던가?
젊은 세대도 할 수 있던 실수를 그들이 했을 때에는 더 비난 하며 이제 그들의 세대는 지나갔다고 말하지는 않았던가?
60대 늙은 여성이라는 다소 비일반적인 주인공의 설정이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졌지만,
그들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다 보니 세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변해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슬픔과
그런 자신을 몰아세우는 차가운 사회적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와서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고 생겨나는 이 연민이라니, 살과 뼈에 대한 새삼스러운 이해라니.
조각은 일을 처리하는 동안 감정에 흔들린 적이 없을 정도로 냉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느 한 사건 이후로 연민이라는 감정이 그녀의 마음속에 싹트게 된다.
다친 그녀가 찾아간 병원에서 그녀를 치료해준 강박사를 만난 후부터 말이다.
피를 흘리고, 옷 안에 각종 무기들이 있는 그녀를 경계하는 것 없이 그저 환자로만 대하는 강박사를 본 후부터 감정이 동요되는 것을 느낀다.
어쩌면 그녀의 정체를 알고도 평범하게 그녀를 대해주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지 않았을까?
평범하게 그녀를 대해주던 류의 죽음 이후 자신을 편견 없이 대해주는 강박사를 보면서 따스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녀는 감정을 저 깊은 곳에 숨겨 놓고 그녀조차 있는지 모른 채 살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이 떠오를 수 있게 해준 것이 강박사의 편견 없는 태도였을 것이고 말이다.
그저 평범하게 대해주는 것 조차도 따스하다고 느낄 정도로 그런 감정을 원하고 있지 않았을까?
조각처럼 투우도 그런 감정 즉 말 그대로의 ‘정’을 원하던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조각과 투우는 수 많이 죽인 사람 중 한 명이 투우의 아버지였다는 것에서부터 인연이 시작된다.
조각은 어린 시절 투우의 가정부였다.
투우의 아버지를 죽이기 위해 위장한 직업이었겠지만 부모와 집에 있을 시간이 극히 적은 투우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투우는 그런 그녀가 아버지를 죽인 후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것을 목격한다.
투우에게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 자체는 크게 그를 동요하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부모조차 주지 않았던 정을 준 그녀가 차갑게 자신을 떠나갔다는 사실은 그를 동요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그녀의 일을 방해하기도 하고 마지막에는 그녀의 감정을 일으킨 강박사의 딸을 납치하기까지 한 것이 아닐까?
어린 자신을 혼자 남겨 둘 정도로 냉정했던 사람이 강박사라는 사람에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 마치 질투하는 것처럼 행동 한 것이다.
결국 그도 정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자신에게 보여줬으면 하는 그 정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그 속의 외침들이 그를 결국 마지막으로 몰아간 것이다.
아무리 냉정하게 보이는 킬러들일지라도 결국은 사람과의 온정을 필요로 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모순이기도 하지 않은가?
이 책에는 단순히 나이에 대한 사회적 시선, 사람과의 온정뿐만 아니라 여러 사회적 문제들을 다룬다.
그런 문제들을 작가의 특유의 표현력으로 담아내고 있다.
책을 읽으며 신기했던 것은 직접적으로 운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는데도 그 슬픔이 너무나도 크게 느껴져 울고 있는 나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런 섬세한 표현들이 이런 문제들을 더 와닿게 하고 반성하게 만드는 것 같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며 보게 되었던 책이었다.
1. 지금 만난 게 저 사람인데! 모두 그런 건 아니라고 해봤자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2. 꽤 탄력이 남아 있는 그녀의 몸과는 대조적으로 주름마다 깊은 그늘이 잡혀 제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는 얼굴과의 불일치에 더 호기심을 보이는 것 같았다.
3. 자신의 신체적 노화가 일상의 노력을 추월한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데에서 비롯되는 초조함이다.
4. 바닥을 구르는 마른 낙엽 같은 인간들이라도 너 자신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려서 상대해.
자꾸 얕봐가면서 식은 죽먹기라고 팔랑팔랑 덤비다간 쓰지 않은 힘의 양만큼 너에게 되돌아올 테니까.
5. 예전이라면, 그래, 혈관은 싱싱하고 팽팽하여 그것을 타고 새로운 피가 끝없이 순환하며 살갗은 탄력이 넘쳐서
내던져도 멍들지 않는 사과 같던 예전이라면 어림도 없는 일.
6. 그녀는 새삼스럽게 자기 팔 안에 있는 사람의 목숨과 그 외 제반 사항들의 무게를 가늠해보았다.
7. 바다를 동경하는 사람이 바닷가에 살지 않는 사람뿐인 것처럼. 손 닿지 않는 존재에 대한 경이감과 숭고한 대상화.
8. 타인의 고통은 아랑곳없이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하려 들겠지만, 조각은 차마 그렇게는 할 수 없다.
9. 대부분의 방역은 이런 식이다.
누가 왜 이것을 원하는지 묻지 않는다. 누가 왜 누군가의 안에서 구제해야할 해충이나 소탕해야 할 쥐새끼가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사람이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또는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된 데에 대해 카프카적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10. 네가 너무 늙어서 누구도 너를 맡으려 하지 않을 게 뻔해서 그렇다.
11. 그러니 언젠가 필요한 때가 되면 너는 저리로 나가는 거다. 그리고 어디로든 가. 알겠니.
살아 있는데, 처치 곤란의 폐기물처럼 타는 쓰레기 안 타는 쓰레기로 구분되기 전에.
12. 정확하게는 그 의뢰인이 한때 갖고 있었던 가족, 그것이 어떤 느낌이며 그것을 불의의 방식으로 잃었을 때 한 사람의 정신이 어느 정도의 손상을 입는지,
과육에서 떨어져 나온 사과 껍질 같은 생의 잔여를 가까이서 들여다본 것이다.
13. 그랬는데 이제 와서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고 생겨나는 이 연민이라니,
살과 뼈에 대한 새삼스러운 이해라니. 노화와 쇠잔의 표지가 아니고서야 이런 일관성 없음이라니.
14. 그러나 지금은 지나치게 자연스럽지 않은가.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고 보따리까지 챙겨주는 소모적인 일이 너무나, 사람이라면 으레 그럴 법한 모습 아닌가. 자신한테 이토록 어울리지 않게.
15. 당신이나 나나 소멸의 한 지점을 향해 부지런히 허물어지고 있다는 데에서 비롯되는 서글픔을 포함하고 있었다.
16. 부품도 단종되고.
고장. 단종.
이제 그만 좀 버리세요.
이거 더 이상 못 버틴다니까.
교체.
17. 그러나 강 박사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느껴질때쯤 그녀는 그의 손목을 걷어차는 데 썼던 오른쪽 발목과 골반이 시큰거리고,
절뚝거리면서 한쪽 다리에 가해지는 무게를 어떻게든 분산시켜보려 하지만 통증에 눈물이 흐르는 걸 막지는 못한다.
18.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하나의 존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혼이라는 게 빠져나갔는데도 육신이 더 무거워진다는 것은.
19. 생각 없고 가벼워 보이는 이 막내의 유일한 장점이 타인의 불행에 대해 공감하는 능력이라면
데리고 있으면서 쓸 만하게 키워보아도 되겠다고 애써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20.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21.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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